인산사상

 

仁山 金一勳의  철학사상과 현실인식


송인창(대전대 철학과)


목 차

Ⅰ. 서언

Ⅱ. 인산 철학사상의 기반

Ⅲ. 인산 철학사상의 특성

Ⅳ. 인산의 현실인식과 대응

Ⅴ 결어




 Ⅰ. 서언

  

  이 글은 《인산의학총서》와 《인산 김일훈선생 일대기》를 주 자료로 하여 독립 운동가이며 사상가이자 《神藥》의 저자이기도 한 仁山 金一勳(1909~1992)의 철학사상을 儒學的 관점에서 검토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저서는 ‘의학의 혁명’이자 ‘혁명의 의학’을 담았다고 일컬어지지만, 아직껏 이에 대한 학술적 접근이 시도된 바가 없다.

  이 글이 밝히고자 하는 바는 길고 어두운 시대의 터널을 살았던 한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의 마지막 儒醫’1)의 철학사상이라는 범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인산이 “거짓이 오히려 진실이라고 당당히 외치며 진실을 거짓인양 모함하고 미워하고 공격하고 괴롭히는”2) 시대를 살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민중과 함께 하는 삶을 통하여 유학의 궁극적 이상인 治國平天下의 세계를 이뤄내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가 “석가세존과 孔子ㆍ主耶蘇 등 옛 聖者들은 한결같이 인류를 마음의 병으로부터 구제시키기 위해 일생동안 고행했으나 愚는 앞으로 도래할 公害毒 및 怪疾, 그 밖의 온갖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愚는 愚生賤生이나 前聖의 廣濟蒼生을 원하는 마음에서 고행을 계속하니 이 또한 天命이며 天運이다.”3)라고 한 말에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읽을 수가 있다.

  새삼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일제 강점기나 그 이후의 삶에서 인산이 보여준 知行一致的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놀라움을 안겨주고 있다. 당대의 제반 현실적 모순과 이념적 갈등에 대해, 사상가이자 의학자로서 그가 보여준 놀라운 통찰력이나,4) 大義와 志操를 목숨처럼 지키면서 仁術을 펴 숱한 병자를 구제하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삶의 자세는 오늘날에도 “가난한 민초들의 醫聖”5)으로 불려지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필자는 인산 철학사상의 기반을 유학적 관점에서 검토하고 그것을 통하여 인산철학사상의 연원과 특성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또 그것이 그가 살았던 당대 현실과 어떤 내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필자는 먼저 인산 철학사상의 기반이 유학임을 규명하고 이를 토대로 인산 철학사상의 구조와 성격 및 특성을 밝힐 것이다. 나아가 “광제창생은 天下諸賢의 大任”6)이라고 하면서 “公害毒과 怪疾의 예방”을 통하여 온 국민의 무병 건강은 물론 복지 국가의 꿈”7)을 이 땅에 구현하고자 한 인산의 活人救世사상과 현실인식 및 대응의 문제를 순차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인산의 철학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전무한 상황에서 인산사상의 철학적 연구를 심화시키고 인산의 지행일치적 삶과 꿈을 정당하게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자 한다.



 Ⅱ. 인산 철학사상의 기반

 

  인산의 철학사상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그의 철학사상이 지닌 기본 입장과 그 기반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지금까지 인산의 철학사상의 연원이나 기반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전무한데다가 그에게 의례 따라붙는 독립운동가ㆍ한학자ㆍ《신약》의 저자ㆍ죽염의 발명자라는 명칭은 그의 철학사상에 대해 성급한 선입견을 강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철학사상에 대한 기반 탐구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인산의 生平과 학문적 연원을 소략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한다.8) 인산은 彦陽人으로 兒名은 哲鎭이며 호는 인산이다. 一勳은 해방 후 스스로 改名한 이름이다. 그는 1909년 음력 3월 25일 亥時에 함경남도 흥원군 용문면 연흥리에서 詩와 거문고에 능했던 유학자 金慶參 과 江陵 劉氏 사이에 7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당시 유학자이자 명의로 이름이 높던 金冕燮이다.9) 이로 보아 그의 가문은 조선 儒醫의 맥을 잇고 있었다. 인산 역시 이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의학에 대한 어릴 적부터의 그의 남다른 관심 또한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대기》에 의하면 인산은 어려서부터 神童으로 불릴 만큼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5세 때 벌써 한글과 한문을 스스로 깨쳤다고 한다. 다음의 예는 이를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한글 自得. 네 살 위의 누나가 당시 유학자이자, 名義로 이름 높던 할아버지 金冕燮으로부터 ‘가갸거겨….’를 외우며 한글 배우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다가 한글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제정된 것임을 간파하였다. 한글의 구성 원리를 자득한 뒤 옥편을 뒤적이며 한글본 《춘향전》을 읽고 이어 한문본 《춘향전》을 읽은 뒤 계속해서 한문본 《名沙十里》, 《능라도》, 《趙雲傳》, 《忠烈傳》, 《三國志》, 《啓明篇》, 《唐詩》, 《杜詩》, 《康熙字典》 등을 차례로 독파하였다.」10)


  이처럼 인산은 총명한 두뇌와 뛰어난 재주를 바탕으로 당시“여러 곳에서 글방 선생으로 초빙을 받던” 아버지 김경삼으로부터 유가의 기본 경전인 《四書三經》은 물론 諸子書와 詩文 등을 두루 배우고 익혔다. 아울러 그는 할아버지 김면섭으로부터 의학에 관한 많은 지식과 비방을 전수받았다. 그가 9세 때에 竹鹽 제조법의 원리를 할아버지에게 설명하였다고 한 《일대기》의 기록은11)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그런 점에서 인산의 《신약》이론은 김면섭의 의학이론을 직접적으로 계승 ․ 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인산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정통으로 받들어 자신의 학문적 목표와 삶의 기준으로 삼고 이를 심화시켜 나갔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참다운 학문이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修濟治平의 유학과 의학을 철저히 공부하고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이 대기층에 색소층이 완전히 무너져 인류가 멸하는 시기를”12) 당하여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유교의 효제충신과 《신약》밖에 없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13)

  이후 인산은 당시의 학문이 ‘修己之學’에만 너무 치우치는 모순을 깨닫고 유학의 본래 정신인 ‘治人之學’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16세 때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또 독특한 仁術을 펴 病苦로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다음의 자료는 당시 인산의 ‘치인지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이해 가을, 의주에서 친구들 네 명과 힘을 합해서 당시 한국인 아이들을 괴롭히고 횡포를 일삼던 같은 또래의 일본인 아이 열댓 명을 때려눕힌 뒤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광복운동에 투신하였다. 모화산 부대(대장 변창호) 대원으로 몇 번의 전투에 참가했(대장일본 경찰에 쫓뎨장소련, 백두산, 묘향산 등지로 도피하였다. 주로 공사판과 금점판, 산판 등을 돌아다니였다막노동으로 연명하였고 때로는 산속에서 약초를 채취하여 그것을 100리 거리의 장터에 던 같팔아서 양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가는 곳마다 독특한 仁術로써 病苦로 신음하는 환자들을 구제하였다.14)


  이 시기 특히 주목되는 사항은 인산의 ‘치인지학’에서 독립운동과 仁術의 병행이 크게 중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19세 때 “죽염을 이용, 만성위장병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고 식이요법과 병용하여 통장진 수력전기 6호 갱에서 일하는 노무자의 진폐증을 고쳐 준 일”15)이라던가, 26세 때 “池乙龍이란 가명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춘천 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을 복역하다 탈출한 일”16) 등은 이점을 이해하는 좋은 단서가 된다. 그러다가 그의 나이 30세 전후에는 毅菴 柳麟錫(1842~1915)의 문인이며 평북 영변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던 充齋 金斗運(1886~1951)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충재는 일찍이 의암의 문하에 執摯 수학한 인물로서 학식과 덕망이 높았고 효성 또한 지극한 의암의 高弟였다.17) 그는 또한 스승인 의암을 좇아서 독립운동에 종사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였다.18) 이러한 충재의 삶과 학문관은 인산의 학문과 가치관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梁大淵의 다음 말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더욱 仁山兄은 李華西의 연원인 유의암의 학통을 받은 充齋 金斗運 선생의 愛弟로 조국 광복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온 學行이 俱全한 軒軒丈夫라 일생동안 北馳南驅하면서 체험한 妙方을 두루 모아 이번에 한 책을 엮어 내는이만치 추호도 거짓이 없는 大作이라 칭송을 아끼지 않으며…後篇도 別界後로 미루지 말으시고 곧이어 繼述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19)


  그리하여 인산은 충재의 교화와 영향 하에 참다운 학문이란 천하의 이치를 깨달아서 천하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며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일임을 몸소 체득하게 되었고, 仁術을 통한 廣濟蒼生에 기반을 두면서도 현실문제에 매우 진취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이 점은 그가 《救世新方》 序文에서 “廣濟蒼生은 天下諸賢의 大任이니 仁愛之心으로 誓救衆生하면 則天功을 人其代之하리니 然則 億兆蒼生에 恩廣幸深矣리라.”20)라고 한 말이나, 같은 책에서 “이 孤客은 인류의 무병과 조국의 경제 부강을 이룩하는 한편 지금 세대가 후손들에 긴 안목이 없는 조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의 아는 바를 서술하는 것이다.”21)라고 한 말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볼 때 인산은 할아버지 金冕燮, 아버지 金慶參, 充齋 金斗運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 유교는 그의 학문과 사상체계의 뿌리가 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인산의 현실인식과 인격형성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유교적 忠孝와 ‘溫故知新’의 정신을 준거의 틀로 삼아 현실사회를 해석하고,22) “질병 없는 사회의 구현”을 위해 신명을 바치고자 했던 것도 또한 여기에 근거한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유교적 忠孝는 인산에게 있어서 인간이 지녀야할 최고의 가치 즉 인간다운 삶에서 그 중심자리를 차지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또한 인산의 삶과 철학사상 그리고 의학사상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 된다. 인산은 그리하여 이 ‘忠孝’ 두 글자를 종신토록 받들어 그것을 체득하고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일을 통해서 自己正位를 확인하였다. 그래서 그는 “목숨 마칠 때까지 (내가) 원하는 바는 忠孝요 평생의 소원은 인류를 구제하는 일이다.”23)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가의 핵심 덕목인 충효가 인류애의 차원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분명히 보게 된다. 다음의 인용문에서도 이 점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교든지 숭배하는 건 좋으나 유교의 孝 ․ 悌 ․ 忠 ․ 信을 나는 제일 숭배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부모에 효심을 가진 사람, 지극히 효도하는 효자, 또 남편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열녀는 하늘이 도와준다. 그래서 그들이 구하면 얼음 속에서도 잉어가 나오고, 겨울 大小寒의 눈 속에서도 수박과 딸기가 나오는 것이다.」24)


  이미 살펴보았듯이 인산의 학문적 기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배운 儒學이었고, 이는 30세 전후에 充齋 문하에서의 ‘治人之學’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 유학 공부를 통하여 더욱 심화 ․ 발전되었다. 즉, 그는 유학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중시하였던 충재의 교화를 통해서 “華西의 嫡傳者였으며 전국 義兵의 지도자였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의병과 애국단체의 총연합체를 이끈 전 민족적 지도자였던”25) 毅菴의 학문적 세계를 몸에 익히게 되었고 孔子 ․ 孟子 ․ 朱子 등 聖人들의 가르침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과정에서 인산은 《주역》의 ‘變通’과 ‘自强不息’의 정신을 바탕으로 유학의 폐습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또 신학문을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기초도 마련하였다. 그가 제자들에게 “지금 화공약 세상에서 사람이 수없이 죽어갈 적엔 그 세상에 실제로 필요한 책이 중한 것이지 허준의 《동의보감》만이 전부는 아니야”라고 하면서 “모든 것은 때를 따라서 필요한 것이야, 공자 때엔 공자가, 맹자 때엔 맹자가 하는 것이면 족해. 이조 5백년도 족하고. 내가 어렸을 때는 공자 ․ 맹자에 밝으면 대우받았어요. 그러다가 서양문명을 따르게 된 것이지.”26)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인산은 유학의 ‘修己之學’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治人之學’, 곧 경세적 실천에 보다 큰 비중을 두어, 지공무사한 태도로 독립운동에 임하고, 인류애적인 정신으로 ‘活人救世’사상을 몸소 구현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사람의 행운은 건강에서 온다. 개개인이 건강하게 되면 가정과 나라가 평화롭고 나아가 인류의 평화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病魔는 인류 공동의 적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적은 癌이다”27)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가 《신약본초》에서 “육신은 개 값에 못가도 지혜는 만고의 태양보다 밝은 光明을 전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은 이를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나는 사람 세상을 위해서 내 일생을 바치는 거지. 내가 젊어서 쉰밥을 먹으면서 쫓겨 댕길 적에 내가 독립운동만을 한 건 아니야. 조상을 위해서 조상의 피를 더럽히지 않고, 조상의 정신을 세상에 흐려놓고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한 거야. 난 애국보다 그런 것에 더 정신을 썼어. 나는 지금 집에다가 정신을 쓴 것보다 지구촌에 내 정신의 100%를 쓰고 있어…. 옛날에 석가모니가 처자를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이야긴 전해지지 않아. 老子가 그렇고 孔子가 그렇고, 이름난 사람들은 처자를 위해서 일한 거 없어요.」28)


  그는 위에서 유학의 근본정신이 ‘修己’보다는 ‘治人’과 ‘이용후생’ 즉, ‘救世濟民’에 있으며 그것이 또 당대 현실에 전혀 구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인산은 유교의 근본정신을 ‘수기’보다는 ‘치인’에서 찾고 또 그것을 통하여 당시의 위기적 ․ 절망적 상황을 초극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신약본초》에서 “내 평생이 내게는 행복이란 말은 필요 없고 또 運이라는 말도 필요 없어요. 운이 있다면 지구를 위해서 필요한 운이어야 돼요. 지구가 행복하게 될 수 있는 운 말입니다.”29)라고 말한 것은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인산의 입장이 인간의 정신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活人救世’사상에 근거하고 있음은 재언을 요하지 않는다. 이 점은 그가 “인간은 小天地다. 그리하여 인간의 靈力은 泰山도 옮기고 大海도 옮기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30)고 하면서 “노쇠 예방과 만병 예방에는 정신력이 최고요, 다음이 藥力이요, 그 다름이 운동력이다.”31)라고 말한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인산은 학문과 삶의 正道를 얻고 구현하는 데에 있어서 할아버지 ․ 아버지 ․ 충재의 가르침, 즉 유학을 준거의 틀로 삼았고, 그가 직면하고 있었던 일제 강점기, 민족분단과 동족상잔, 군사독재, 산업화와 민주화에 따른 정치 ․ 사회 ․ 사상적 혼돈에 대한 위기의식 하에서 더욱 절실한 것으로 그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 그래서 인산은 당시의 현실에 대하여 “世衰道微하니 不孝父母하며, 不忠國政하며, 不敬師長하며, 不信朋友하는”32) 시대로 진단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산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논리와 힘을 찾고자 하였고, 자신이 모색하는 사상의 근원으로서, 또는 그 정당화의 근거로서 ‘忠孝’의 제창과33) ‘活人救世’를 통한 이용후생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발현시키기 위해 주체적 인간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스스로 그 시대의 참된 선비의 마지막 典範이자 조선의 마지막 儒醫이고자 하였다. 그런 점에서도 민초들의 醫聖으로 추앙받았던 인산의 다음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조 오백년에 남을 해치기만 하다가 매국노가 나라를 팔아먹고 말았는데, 오늘은 무엇하는 거냐? 나를 해친다. 내가 얼마 전에도 나는 이 지구가 생긴 후에 전무후무한 사람이라고 했다. 전무후무한 사람이라는 말은 머릿속에는 천지간에서 당할 자가 없다는 증거다. 옛날의 聖者들이 못한 걸 모조리 다하고 갈 수 있는 때가 지금이다. 이 대기층에 색소층이 완전히 무너져가지고 인류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되었는데, 나는 그것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강제로 막 욕을 하고 박해를 가할라고 하는데 그게 얼마나 불출이며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어.」34)



Ⅲ. 인산 철학사상의 특성


  앞서 필자는 인산 철학사상의 뿌리가 儒學의 忠孝사상과 醫術을 통한 ‘活人救世’에 있음을 검토한 바 있다. 그것은 그가 몸담았던 일제 강점기와 부조리로 얼룩진 현대라는 시대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으며, 또한 유학의 핵심과제를 ‘修己’보다 ‘治人’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몸소 실천하려는 태도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그래서 그는 “아는 비밀을 젊은 세대에게 전해주고 가는 것”35)이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고, “아무리 곤란을 받아도 불쌍한 사람을 살려주는 것이 의술의 근본 방책”36)이라고 믿었다. 이런 점에서도 인산이 그토록 강조했던 ‘충효’나 ‘활인구세’는 유학을 개혁적이고 사회 실천적인 측면에서 계승ㆍ발전시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다음 말에서도 이 점은 선명히 나타난다.


「포은ㆍ야은ㆍ목은 三隱의 힘이 조선을 만들었다. 도덕인륜이 儒道가 아닌가. 고려말도 개판이었지만 지금은 더 개판이다. 오늘날은 도학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하늘은 아버지로서 天倫이고, 땅은 어머니로서 地倫이고, 사람은 人倫이다. 아버지ㆍ어머니가 하늘과 땅인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노상 반대만 한다. 그러데 어떻게 사람이 하늘과 땅을 반대하고 살 수가 있어. 미친놈이나 아버지 어머니를 반대하지. 사람이 부모 봉양하는 일을 저버리고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겠나? 다 구해야 되고, 다 살려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이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늘도 살리고 땅도 살릴 수 있는 주인공이야, 그런데 사람이 悖常ㆍ滅倫하고서는 절대 세상을 구할 수가 없어.」37)


  이 처럼 인산은 유학의 본령이 충과 효를 통한 ‘활인구세’임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무엇을 아느냐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철학사상도 이런 각도에서 이해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인산이 4,5세라는 어린 나이 때부터 유가 경전을 학습하였고, 또 30세 전후에는 의암의 문인 충재 김두운의 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학계의 최대 관심사였던 理氣ㆍ心性論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별반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 이를 잘 나타내준다. 그렇다고 인산이 당대의 지배적 이념이자 문화원리인 주자학의 사유방식을 완전히 벗어난 철학을 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그가 《醫藥神聖》에서 “大道者는 陰陽之原이며 萬象之本이고, 精靈氣者는 天地之本이며 萬物之原이다.”38)라고 한 말이나, 《우주와 신약》에서 “性은 理니 生物之性은 理요, 生物之命은 氣다. …… 太極은 道요 太極之前 太虛는 氣요, 太虛之前 太空은 理니 性之元이다.”39)라고 한 말은 여기에 많은 참고가 된다. 이 경우 大道나 道, 性은 형이상자로서 理의 원리성을 가리키고 太虛나 음양, 精靈은 형이하자로서 氣의 구체성을 지칭한다. 이 논법은 우주 만물의 生滅變化를 理와 氣라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면서 태극ㆍ형이상자ㆍ道를 理로, 음양ㆍ형이하자ㆍ器를 氣로 규정한 朱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이해하면 인산의 철학은 주자학을 체로 하고 의학을 용으로 하는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주자학은 리의 일차성과 우월성을 바탕으로 리와 기를 엄격히 구분한다. 여기에서 리는 사물보다 앞서 존재하게 되고(理在事先). 사물 위에 존재하게 된다(理在事上). 그것은 어떤 사물이 아직 생성되지 않았을 때에도 그 사물의 규율이나 법칙, 또는 원리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0) 인산 역시 理氣二元論的 사유방식 안에서 리를 근원성ㆍ통일성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리와 기의 관계를 體와 用 으로 나누어 표현하는 방식의 철학을 하였다. 인산의 저술 속에는 물론 주자학의 핵심주제인 리기심성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다룬 글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하더라도 인산의 철학사상 속에 내함되어 있는 理優位的 思考와 마음과 정신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관점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그가 태극을 만물화생의 근본이라고 하면서 “五核之源은 五素이고 五素之源은 五神이며, 五神之源은 水氣火氣이다. 水火二氣之源은 一理이고 一理之源은 太極이다.”41)라고 한 말이나, “性은 이치(理)이니 천지의 이치요, 생명의 性은 이치이니 자연의 이치다. 생물은 命은 氣요 생물이 運은 靈이다.”42)라고 말한 것, 그리고 “醫員이란 모름지기 이치를 통달해야 한다.”43)라고 말한 것은 그 단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인산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육신 세계에 살더라도 정신세계는 잊지 말아야 한다. 정신이 육신을 위하여 한시도 떠나지 아니하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정신이 번뇌망상에 시달이지 않도록 사는 것이 현명한 사람의 삶이다.」44)


「만병은 치료할 적에 마음이 전일하고 정신을 통일하면 천지의 명과 성령의 가호가 있을 것이요 마음은 번뇌하고 정신이 망상에 사로잡히면 만병은 치료될 수 없다. 神藥의 힘과 정신의 힘이 모두 있어야 병은 완쾌된다.」45) 


「性은 마음의 근원이니 마음이 밝으면 마음속에 성이 있고 七神이 있어서 우주의 모든 신이 마음속으로 다 모인다.」46)


   위의 세 예에서도 인산의 리우위적 사고와 몸보다 마음과 정신을 더 중시하는 사유방식은 분명하게 표출되고 있다. 그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육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정신이요 마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볼 때 정신이나 마음은 理가 되고, 육신은 氣가 됨은 명백하다. 이러한 논법은 인산이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던 간에 주자의 “마음은 몸을 주재하는 것으로서 그 본체가 되는 것은 性이며 그 작용이 되는 것은 情이다.”47)라는 말과 상당히 일치한다. 이와 같은 인산의 시각은 주자학이 가져온 많은 폐습과 모순을 비판하면서도48) 부모형제의 一心과 君臣 일심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음의 글에서도 여실히 입증된다.


「국가에는 忠이요 사회에는 敬이니 인간은 孝가 법이다. 가정에는 부모와 형제이니 부모의 慈愛之心과 형제의 孝敬之心이면 부모형제는 一心이 된다. 君은 大德者爲君하여 大道로 長短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불길하게 된다. 使臣하고 大義ㆍ大節로 訓臣하니 曰御命이다. 그리하면 君臣一心이 된다.」49) 

  

  여기서 나타난 인산의 생각은 분명히 군신ㆍ부자ㆍ형제ㆍ부부ㆍ붕우 등 五倫을 하나의 理로 묶고 또 그것을 통해 인류의 궁극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던50) 주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가 《의학신성》에서 “위정자가 孝治天下면 지구는 一家가 되고 萬姓은 동족이 된다. 만인은 一心이다.一心은 또 孝心이다. 가정에서 자손이 효친하면 부부화락하고 형제우애하여 家和萬事成이다. 조정에 賢臣之道는 節義로 충성하면 君臣一心이 되고 만민이 감화된다.”51)고한 말도 이 문제에 관련된다. 그렇지만 인산은 주자학적 사유와 논리를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廣濟蒼生은 天下諸賢의 大任”52)이라고 하면서 “무병장수하고 불로장생하며 나아가 國益에 기여할 수 있는”53) ‘신약’의 개발과 가난한 민초들에게 仁術을 베푸는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인산의 이러한 입장은 주자의 理一分殊說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이 경우 ‘리일분수’란 하나의 근본 토대 위에서 무수하게 다른 양상들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때의 ‘分’은 각자에게 합당한 본분, 몫, 역할, 직분, 의무 등의 뜻을 지닌다.54) 주자가 “리는 오직 하나일 뿐이다. 도리는 같은데 그 직분이 다르기 때문에 君臣에게는 군신의 도리가 있고, 父子에게는 부자의 도리가 있다.”55)라고 한 말에서 이 점이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렇게 본다면 인산에게 있어서 ‘理’는 體이며 주자학을 의미하고, ‘分’은 用이며 의학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산은 한 특별 강연회에서 “인간사회에서는 첫째 孝가 앞서야 되고, 그러면 충성 ‘忠’자가 따라 온다. 충자가 따르면 공경 ‘敬’자도 따라온다. 이 지구상에 ‘孝悌忠信’이 있는데 무엇이 잘못되겠는가”56)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리우위적 사고가 짙게 깔려 있다. 리를 중시하고 리와 기를 변별하는 인산의 이와 같은 논법은 주자학과 의학을 체와 용으로 나누고 또 의학에서 육신보다 마음 내지 정신을 더 중시했던 태도로 표현되었다. 그가 “마음은 活人하는 마음을 위주하면 天佑神助하여 효능이 神과 같다.”57)고 하면서 “노쇠예방과 만병에는 정신력이 최고요, 다음이 藥力이요, 그 다음이 운동력이다.”58)라고 한 말을 통해서도 이점은 어느정도 확인된다. 그런 점에서 인산철학이 가지고 있는 사유의 기본틀은 주자학의 관점을 직ㆍ간접적으로 계승ㆍ발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어떤 사람도 자신의 본래성으로서의 天心을 회복하게 되면 天地와 하나가 된다고 하면서59) “苦行과 忍辱이 마음을 닦는 근본이다.”60)라고 말한 것이나, “마음이 天心이면 靈素가 강하게 주장하므로 탁한 기운이 못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極善者는 薰氣가 돌며 瑞氣롭고, 極惡者는 冷氣가 돌며 찬바람이 인다.”61)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속단하기 곤란하나 이러한 입장과 논법은 그의 氣에대한 이해나 해석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다.



「우주의 자연 속에서 인자란 善心을 키우면 금수ㆍ어별ㆍ곤충도 호흡으로 우주 영력은 흡수하여 천년 후에 완전히 神化한다. 호흡으로 善心養氣하면 神龍으로 화하지만 惡心養氣하면 凶物인 이무기로 화한다.」62)


「지구 생물은 천지의 정기를 축적하게 되면 電劇物이 된다. 그렇다할지라도 惡心이 발하면 惡氣로 변하여 震死하게 되고, 일생 善心을 갖게 되면 만년 吉氣, 瑞氣, 生氣로 장생불사하게 된다.」63)


「우주의 생명은 氣요, 氣의 생명은 靈素ㆍ色素이다. 공간은 氣海니, 음기ㆍ양기가 있다. 陽氣는 전류니 實用物이요 陰氣는 귀신인데 불가사의한 힘은 있어도 실용물은 아니다.」64)


  인산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善心과 惡心이 있듯이 우주 자연 속에도 善氣와 惡氣, 음기와 양기가 있다. 이 경우 善心ㆍ善氣ㆍ陽氣는 理라고 할 수 있고, 惡心ㆍ惡氣ㆍ陰氣는 氣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윤리도덕적 차원에서 氣를 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주자의 리기이원론적 사유와 논리에 근거한 것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그가 보다 중시한 것은 물론 理로서의 선심이고 선기고 양기이다. 이렇게 리를 높이는 입장은 인산에게 있어서 현실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출발점이자 귀착점이 된다. 그가 “오늘날 공해세계의 병을 치료하는 데는 옛날 醫書만 가지고는 안 된다.”65)고 하면서 평생 ‘신약’의 개발과 병자치료에 진력했던 일이나츬료하효제충신에 위배되는 종교츬료賣官賣爵츬료탐관오리츬료간신배, 역신배, 賣國賊의 爲政社會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66)고 목소리를 높였던 일, 그리고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임을 천명한 일”67) 등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인산은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인간의 문제는 인간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독특한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사람이 주인공인데 어디가 빌어? 나무에 빌고 돌에 빌고 하느님에게 빌고 부처님한테 빌고, 자기가 스스로 힘을 길러서 제 힘으로 무엇을 이룰 생각은 하지 않고 남한테 빌기만 하면 무엇이 이루어지겠어. …… 이 우주가 전부 날 위해서 필요한 것이야. 이 공간의 색소나 분자가 모두 날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중요한 것은 나를 위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지식이나 지혜가 필요할 뿐이야.」68)


  여기서 이른바 “큰 재주 나오면 소인배들이 음해해서 죽이고”,69) “죽을 사람 살리고도 고발당해 9번씩이나 벌금을 내야하는 미개한 시대”70)를 살면서도 거기에 아부하거나 굴하지 않고 오직 “病魔의 지옥으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71) 신명을 바쳤던 인산철학의 이론적 근거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가 《구세신방》에서 “나의 고행은 오직 公害毒과 怪疾의 예방을 위해서다. 나는 비록 寒士貧家의 출신이나 선천적으로 약의 묘한 이치를 터득하여 그 실험을 위해 일생 동안 고행을 불사했다.”72)라고 한 말에서도 이 점이 여실하게 보여진다.

  이러한 의식의 밑바탕에는 물론 리기이원론적 사유체계와, 광제창생과 효제충신만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유일한 일로 여기는 기본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 점에서 인산의 이와 같은 논법은 “우주의 모든 것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고, 광선속의 모든 원료, 즉 색소나 분자가 사람을 중심하고 내려와 모든 에너지를 만든다.”73)는 믿음에서 정향된 시도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야말로 인산철학의 특징이자, 주자학을 체로 하고 의학을 용으로 하여 철학과 의학의 통섭을 시도하였고 또 그것을 통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질병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인산의 참뜻이 아니겠는가.



 Ⅳ. 인산의 현실인식과 대응

  

  이제껏 필자는 인산철학사상의 특성이 주자학의 사유구조 안에서 철학과 의학을 통섭시키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데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구체적 방법이 다름 아닌 ‘효제충신’과 ‘활인구세의 정신’이라는 것도 확인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인산철학사상을 검토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띠는 것은 인간의 질병 원인을 우주만물에까지 연결시키고 인간의 질병 치료를 윤리도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음의 예문은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인간의 질병은 자신의 부주의에서 오는 것이 많지만 다음과 같은 것도 중요한 질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조상에게서 받은 병은 유전성이 되고, 家運에서 받은 병은 損財數와 병이 된다. 地運에서 받은 병은 地上公害로 발생하는 괴질로서 금수ㆍ蟲魚ㆍ초목도 함께 받는 병이 되고, 山川神靈에서 받은 병은 運毒으로 장질부사(장티부스)와 호열자(코레라) 등의 병이 된다. 국가적 불운에서 받은 병은 核病과 戰鬪重傷의 불구자의 병이 되고, 天運에서 받은 병은 魔王의 작해로 오는 병이 된다. 또 정신병인 魔敎와 邪敎와 雜敎 들은 非倫理이며 非道德 이며, 非慈悲이며 非博愛이며, 비인도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불치의 병들은 오직 신비로운 약과 정신력으로만이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74)


「醫라 하는 것은 마땅의자(宜字)와 같다. 자연에 마땅하게 하고 大氣에 마땅하게 하고 本分에 마땅하게 하여 그 기운이 造化하면 그 妙를 얻게 되고 그 묘가 조화하면 그 신통한 것을 얻게 되는데 그 얻는 방법은 神과 氣가 같은 이치이다. 옳고 참된 마음은 병이 있을 수 없고 모든 병을 치료하는데 全知全能하다.」75)


  인산에 의하면 인간은 三才的 존재이고, 인간의 참된 건강은 정신력과 윤리력에서 비롯된다. 그가 醫字를 모든 일에 마땅함을 얻는 의미로 해석한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로 여기에서 주자학을 체로 하고 의학을 용으로 하여 ‘활인구세’하고자 했던 인산철학사상과 현실인식, 그리고 현실대응 사이의 독특한 양상이 나타난다. 이 경우 ‘活人救世’란 “仁愛之心으로 誓救衆生하여 天功을 대신한다.”76)는 의미로서, “우주보물로 무병장수하고 불로장생하는 법과 地上生物로 국익과 국민에게 기여하는 것”77)을 가리킨다.

  그러면 리우위적 사유방식을 근간으로 하여 ‘활인구세’에 평생을 걸었던 인산이 생각한 현실의 바람직한 모습은 무엇인가. 인산의 경우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이 확립되고,78) 국민 모두가 孝悌忠信을 근본으로 삼으며,79) 병든자나 불구자가 하나도 없는 세상80)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인산은 오로지 ‘효제충신’과 ‘활인구세’만이 인간의 보편적 가치이자 실천 덕목이라고 확신했고, 또 그것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는 현실만을 자신의 참된 현실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주보물을 알면서 일생을 개발할 財源이 없어서 지구상의 가족을 구원하지 못한 恨이 말년에 괴롭다. 上古의 神人의 한은 알고도 남는다.”81)라고 술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산에게 있어서 참된 현실이란 “종교의 종파로 인한 인류의 분열과 사상분열로 인한 대립과 족벌로 인한 侵害며 복수전이 없고”,82) 孝親ㆍ忠君ㆍ敬長ㆍ愛幼ㆍ崇祖ㆍ誠神 등과 같은 덕목이 존중되며,83) “인간이 영원한 세대에 걸쳐 무병장수할 수 있는”84) 도덕과 의학이 통섭된 도덕적 가치의 세계였다. 인산이 “효친의 도와 충군의 도와 敬長의 도를 가지고 國敎로 삼아야 한다.”85)고 주장한 것은 이를 단적으로 요약해 준다.

  이러한 ‘효제충신’과 ‘활인구세’ 정신을 바탕으로 인산은 病者 구제와 신약개발에 진력하게 되었고, 또 저술ㆍ강연회 등의 많은 활동을 통해 한국민의 주체성 확립과 윤리의식의 고취에도 심혈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86) 이 경우 ‘효제충신’은 체가 되고 ‘활인구세’는 용이 된다. 이를 《大學》의 修齊治平의 논리를 빌려 말한다면 ‘효제충신’은 修齊에 가깝고, ‘활인구세’는 治平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효제충신’을 중시하는 관점은 인산이 주자학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하고 있음87)에도 불구하고 기본 성격에서는 주자학의 범주에 속함을 추정하게 만든다.

  효제충신이란 人心의 발현으로서 사람이 지키고 따라야할 도리 가운데에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덕목이다. 효제가 내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면 충신은 외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이로써 보면 효제는 對自관계를 가리키는 개념이고, 충신은 對他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 둘은 仁을 실천하고 仁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하나라도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仁道는 內外를 관통하여 안으로는 자신을 완성하고 밖으로는 만물을 완성하는 도이기 때문이다.88) 孔子가 仁의 근본으로 孝悌를 말한 것이나89) 主忠信을 강조한 것90)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인산이 《의약신성》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和平하고 가족의 몸과 마음이 화평하면, 이웃과 국민과 세계인류의 몸과 마음이 화평하게 된다.”91)라고 말한 것도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고 할 때 ‘효제충신’이란 말은 인산의 현실관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개념이 되며, 그가 생각한바 인간이 지녀야 할 최상위의 가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앞에서도 예를 든 바 있는 “몸이 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원하는 바는 충성과 효도요(終身之願忠孝).”라고 힘주어 말한 것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인산의 철학사상에 있어서 ‘현실’과 ‘이상’은 理一分殊的인 관계를 갖고 있다. 그것은 ‘효제충신’이라고 하는 근본토대(理一) 위에서 ‘활인구세’을 위한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법들(分殊)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인산의 다음 말에서도 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인류를 病厄으로부터 구제하는 일은 아무리 위대한 지혜를 지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지혜와 함께 陰德을 쌓아야 비로소 蒼生救濟의 대업을 이룰 수 있게 된다.」92)


  여기서 ‘음덕’이란 《주역》 「곤괘ㆍ문언전」의 “積善之家必有餘慶(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많은 경사가 있다.)”의 ‘積善’과 같은 의미로서 ‘효제충신’의 간단없는 실천을 통해 얻어진 德 그 자체를 가리킨다. 이렇게 보면 ‘음덕’이나 ‘효제충신’은 ‘理一’이고 ‘體’며 ‘이상’이 되고, ‘활인구세’는 ‘分殊’이고 ‘用’이며 ‘현실’이 된다. 여기서 인산이 더 중시한 것은 물론 ‘분수’의 세계가 아니라 ‘理一’의 세계이며, ‘현실’세계가 아니라 ‘이상’의 세계였다. 그가 《신약》에서 “이루 형언하기조차 힘든 苦行을 감내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仁術을 베풀어 온 나의 음덕은 앞으로 후세의 인류를 病苦로부터 구제하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93)라고 한 말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인산은 몸보다 마음과 정신을 더 중시하여 “우주의 전능을 완전히 갖춘 존재”94)로서의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병을 치료할 것을 촉구했고, 또 이를 통해 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神人共感하는 세상을 구축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젖만 떨어지면 자신의 병은 자신이 스스로 고치도록 하는 것이 나의 의학이다. 내가 앞으로 내는 醫書는 매우 간단하다. 사깃꾼들이 발을 못 붙이는 의서다. 복잡한 것은 어떻게 보면 사깃꾼들이 하는 짓거리이다.”95)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인산이 강조한 ‘효제충신’이나 ‘활인구세’는 인류가 평화공존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며 대한민국이 인류의 선도자ㆍ先進者가 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기도 하다.96) 그 결과 그는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자연의 寶庫는 인간의 터전인 지구며 지구에서 자연의 보고는 한국”97)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우주의 神妙와 신비는 色素 주에서 化한다. 나는 생기색소와 신비색소의 완전무결한 이용법을 세상에 전하러 왔다. 앞으로 동양사람은 합심협력하여 한국 상공의 신묘신비의 생기색소인 人蔘分子 보고를 개발하고 한국명승지에는 수십억 인구를 수용할 시설과 양생식품을 구비하여 자연치료에 힘쓰면 인류의 모든 현대난치병이 퇴치될 것이다.」98)


  이로써 볼 때 인산은 ‘효제충신’을 內와 本으로 삼고 ‘구세제민’을 外와 末로 삼아 ‘無病强國’과 인류의 평화공존을 추구했으며 그 속에서 자신의 도덕적 합당성을 확인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과 인간다움은 도덕성과 사회성에 있으며 그 존재방식은 ‘수기’하고 ‘치인’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를 바탕으로 주자학과 의학을 통섭하려고 노력하였고 인류가 무병건강하고 불로장생할 수 있는 비법을 인간세에 전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그는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유학이 온 세상 학문의 바탕이 되며, 동양사상의 근저”99)라는 확신을 가지고 “核毒의 피해가 극에 달하고”100) “화공약 때문에 어린 아이들의 수명이 단축되는”101) 세상을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손수 사재를 털어 “죽염과 五核丹을 비롯한 수백가지 신한방약물을”102)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하기 때문에 인산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우선 육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병든 사람이 많고 또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결코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없다. 나라의 힘은 곧 사람의 힘이고, 백성의 힘은 나라의 힘이다. 백성이 전부 병들어 죽는데 나라의 힘이 어떻게 약화되지 않겠는가. 정당끼리 싸우는 것 보담 백성이 병들어 일찍 죽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나는 하루 빨리 모든 민족이 건강했으면 좋겠다.」103)


  당대는 ‘효제충신’과 ‘활인구세’가 다른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요하게 요하는 시기이면서, 그러나 또한 ‘효제충신’이나 ‘활인구세’가 유례없이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보는 데서 인산의 철학 사상은 사회정치적 모순에 대한 비판의 칼날이 되고 또 그 존재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도덕의식이 날로 희박해져 “사기꾼들만 득실거리고,”104) “조상 제사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는 피라미 같은 최저질들이 난무하고,”105)“이상한 병과 미친 사람의 수효가 급증하는 시대”106)에 처하며 이를 바로 잡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의 지표가 주자학을 체로하고 의학을 용으로 하는 ‘효제충신’과 ‘활인구세’의 올바른 구현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유의할 것은 인산의 이러한 논법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유교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107) 그것을 의학적으로 실용화시켜 이땅에서 병든자ㆍ불구자가 하나도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위대한 儒醫이자 神醫의 ‘苦行과 忍辱’으로 점철된 삶108)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Ⅴ 결어

  

  필자는 인산 철학사상에 대한 정당한 이해와 평가를 위한 하나의 전초 작업으로서 인산철학사상의 기반, 인산 철학사상의 특성, 인산의 현실인식과 그 대응의 문제를 주자학적 관점에서 해명해 보았다. 그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산 철학사상의 기반은 당시 儒醫였던 할아버지 金冕燮과 유학자인 아버지 金慶參으로부터 배운 유학과 의학이었다. 그는 이 둘을 통섭시켜 ‘忠孝의 제창’과 ‘活人救世’의 정신으로 현실화 시켰다. 그런 면에서 인산은 조선 儒醫의 맥을 충실히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치인지학’에 바탕을 둔 유학적 사유체계는 30세 전후 의암 문인이었던 充齋 金斗運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심화 발전되었는데, 이 만남은 인산이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산의 유학에 대한 이해가 보다 특이하고 남다른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인산의 철학사상은 朱子의 리우위적 사유와 논리 안에서 철학과 의학의 통섭을 시도하고 또 그것을 통해 인류가 무병건강하고 불로장생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 데서 그 특성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理一分殊적 관점에서 주자학을 體로 하고 의학을 用으로 하여 인간의 질병과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그 대안으로서 ‘효제충신’과 ‘활인구세’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산 철학사상의 전반적 내용과 성격은 주자적 사유와 논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세부적인 내용이나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주자와 많은 차이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 단적인 예가 ‘心’을 天心ㆍ地心ㆍ人心으로 나눈 것이나,109) 사람의 마음을 五行 가운데 하나인 火氣로 본 점,110) 그리고 孝心 하나면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하나로 통일 될 수 있다111)고 하는 등의 주장이다.

  여하튼 이를 근거로 인산은 물질이나 육신보다는 정신과 마음을 우위에 두면서 사람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는 철학을 수립하였고, 인간의 질병문제나 사회문제를 윤리ㆍ도덕적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가 《구세신방》에서 “충효는 국가적인 큰병을 치료하는 데 神藥이라 할 수 있고 도덕은 국가적인 큰병을 치료하는 데 仙藥이라 할 수 있다.”112)라고 한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인산에 의하면 바람직한 현실은 國格이 바로서고, 국민 모두가 효제충신을 근본으로 삼아 육신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가리킨다. 이는 물론 인산이 효제충신만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유일한 길이고, 그것이 또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이자 최고의 덕목이라는 믿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인산이 오늘날의 질병치료는 옛날 醫書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평생 신약을 개발하고 병든자를 구제하는 데 진력했던 일, 효제충신에 위배되는 종교, 사상, 정치, 이념 등을 혹독하게 비판한 일 및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라고 주장한 일 등의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진다. 이렇게 보면 인산의 철학사상은 ‘효제충신’을 內와 本으로 삼고, ‘활인구세’를 外와 末 로 삼아 無病强國과 인류의 평화공존을 이 땅위에 구현하고자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람은 사람의 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 처자식 봉양은 안하고 저 혼자 도 닦는 일은 잘못된 일이다.”113)라는 말이나, “이제 본인은 무병건강하고 불로장생하며 나아가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114)라고 한 인산의 말을 전폭적으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필자가 시도했던 인산철학사상에 대한 주자학적 검토는 인산철학사상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자평도 해보지만 충분한 연구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인산을 의약서인 《神藥》을 출간한 醫者로만 보려고 하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로서의 뜨거운 삶을 살았던 인산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하는 점에서 큰 위안을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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